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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운동장으로 내려가는 두세 단의 오야석(역자주:우쓰노미야 시 오야마치 부근에서 채석되는 녹색 응회암)으로 만든 돌계단에 앉아 있었다. 그 주위에는 이야기에 넋을 잃은 네댓 명의 후배들이 있었고, 튤립, 스위트피, 아네모네, 양귀비와 같은 5월의 꽃들이 경사진 화단에 일제히 피어 있었다. 그리고 머리 위에는 후박나무가 하얀색의 크고 탐스러운 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야기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마치 동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2미터쯤 거리를 두고 운동장 벤치에 혼자 앉아 있었다. 그것이 나의 독특한 예의였다.

5월의 꽃들과, 긍지로 가득한 제복, 밝은 웃음소리 등에 대한 예의였다.

그러나 젊은 영웅은 숭배자들보다도 재 쪽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나만의 위풍에 흔들리지 않는 듯이 보였고, 그렇게 보인다는 점이 그의 긍지를 손상시켰다. 그는 모두에게 내 이름을 물었다. 그리고는, "어이, 미조구치."

하고 초면인 나를 불렀다. 나는 입을 다문 채로 빤히 그를 쳐다보았다. 나를 향한 그의 웃음은 권력자의 아무와도 비슷한 데가 있었다.

"왜 대답이 없어? 벙어린가, 자네는?"

"마, 마, 마, 말더듬이입니다."

하고 숭배자 하나가 나 대신에 대답하자, 모두가 배를 움켜쥐고 웃었다.

비웃음이란 얼마나 눈부신 것인가! 나에게는 같은 반 소년들의, 소년 사절 특유의 잔혹한 웃음이, 눈부시게 빛나는 무성한 나뭇잎처럼 찬란하게 보였다.

"뭐야, 말더듬이야? 자네도 해기(역자주:"해군 기관 학교"의 준말)에 들어오지 않겠나? 말더듬이 따윈, 하루에 두들겨 고쳐 줄 테니."

나는 어쩐 일인지, 얼떨결에 명료한 대답을 했다. 말은 줄줄 흐르듯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순식간에 나왔다.

"안 들어가겠습니다. 저는 증이 될 겁니다."

모두들 조용해졌다. 젊은 영웅은 고개를 숙이고는, 그 옆의 풀을 뜯어 입에 물었다.

"그래? 그렇다면 몇 년 후에는 나도 자네의 신세를 지게 되겠군."

그해에는 이미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때 나에게 분명하게 하나의 자각이 생겼다. 어둠의 세계를 향하여 팔을 크게 벌린 채 기다리면 된다는 것. 머지않아 5월의 꽃들도, 제복을 입은 자들도, 짓궂은 급우들도, 내가 벌리고 있는 팔 안에 들어오리라는 것. 내가 세상을 바닥으로부터 쥐어짜서 움켜쥐고 있다는 자각을 지녀야 한다는 것. 하지만 이러한 자각은 소년의 긍지가 되기에는 너무도 무거웠다.

긍지는 좀더 가볍고 밝고 눈에 잘 보이며, 찬란한 것이어야만 한다 눈에 보이는 것이 있으면 좋겠다. 누구나 볼 수 있으며, 그것이 내 긍지가 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좋으련만. 이를테면, 그가 허리에 차고 있는 단검이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중학생들 모두가 동경하는 단검은, 정말로 아름다운 장식이었다. 해군 생도들은 그 단검으로 몰래 연필을 깎는다고 하는데, 그토록 장엄한 상징을 일부러 사소한 용도에 사용하다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

마침, 기관 학교의 제복은 벗어 놓은 그대로 하얀 페인트 칠을 한 울타리에 걸쳐져 있었다. 바지도, 하얀 속 셔츠도... 그러한 것들은 꽃 가까이에서 땀에 젖은 젊은이의 체취를 풍기고 있었다. 꿀벌이 잘못 알고 그 하얗게 빛나는 셔츠의 꽃에 날개를 쉬고 있었다. 금실로 장식한 제모는, 그의 머리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단정히, 깊숙히, 울타리에 씌워져 있었다. 그는 후배들의 도전을 받고 뒤쪽 모래사장에 씨름하러 간 것이다.

벗어 놓은 그러한 것들은, 긍지의 묘지와도 같은 인상을 주었다. 5월의 수많은 꽃들이 그러한 느낌을 더해 주었다. 그 중에서도, 차양이 칠흑처럼 빛을 반사하는 제모나, 그 곁에 걸어진 혁대와 단검은, 그의 육체로부터 분리되어 오히려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발산하며, 그 자체가 추억만큼이나 완전하여... 마치 젊은 영웅의 유품과도 같아 보였다.

나는 주위에 인기척이 없음을 확인하였다. 씨름터에서 환성이 솟았다. 나는 주위에서 녹슨 연필깎이 칼을 꺼내어 조심스레 다가가, 그 아름다운 단검의 검정색 칼집 뒤쪽에 두세 가닥의 보기 흉한 칼자국을 새겼다...

이상과 같은 기술을 보고 나를 시인 기질이 있는 소년이라고 속단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까지, 시는 고사하고 수기조차도 쓴 적이 없다. 남에게 뒤지는 능력을 다른 능력으로 보충하여, 그것을 가지고 남보다 앞서겠다는 충동이 나에게는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 나는 예술가가 되기에는 너무도 오만하였다. 폭군이나 위대한 예술가가 되겠다는 꿈은 꿈일 뿐, 실제로 착수하여 무엇인가를 해내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남에게 이해되니 않는다는 점이 유일한 긍지였기 때문에 ,무엇인가 남들을 이해시키겠다는 표현의 충동을 느끼지 못했다. 남들 눈에 띄는 것들이 나에게는 숙명적으로 부여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고독은 자꾸만 살쪄 갔다. 마치 돼지처럼.

돌연히 나의 회상은, 우리 마을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으로 옮겨간다. 이 사건과는 실제로 아무런 상관도 없는 나였지만, 그래도 여전히, 내가 관여하고 참가하였다는 생생한 느낌이 지워지지 않는다.

나는 사건을 통하여 단숨에 모든 것들에 직면하게 되었다. 인생에, 관능에, 배신에, 증오와 사랑에, 모든 것들에. 그리고 그 속에 숨겨진 숭고한 요소를, 내 기억은 고의로 부정하고 간과하였다.

숙부 집에서 두 집 건너에 예쁜 소녀가 살고 있었다. 우이코라는 이름이었다.

눈이 크고 맑았다. 집이 부자라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태도가 도도했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귀여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혼자서 지냈으며,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시기심이 강한 여자들은 우이코가 아마도 아직 처녀일 터인데도, 저런 인상이야말로 석녀상이라는 등의 소문을 퍼트렸다.

우이코는 여학교를 갓 졸업하고, 마이즈루 해군 병원의 특지(역자주:'특별 지원'의 준말) 간호사가 되었다. 병원은 자전거로 통근 할 수 있는 거리였다.

하지만 아침 출근은 동트기 전에 집을 나서기 때문에, 우리들이 등교하는 것보다 2시간 정도 빨랐다.

어느 날 밤, 우이코의 육체를 생각하며 암울한 공상에 빠져서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던 나는, 날이 밝기도 전에 잠자리를 빠져나와 운동화를 신고, 여름 새벽의 어둠이 깔린 집 밖으로 나섰다.

우이코의 육체를 생각한 것은 그날 밤이 처음은 아니다. 이따금 생각하고 있던 것이 점차로 고착되어, 마치 그러한 생각의 덩어리처럼, 우이코의 몸은 하얗고 탄력이 있으며, 희미한 어둠에 잠긴, 냄새를 느낄 수 있는 하나의 육체로 응결되어 보린 것이다. 나는 그 육체를 만질 때 손가락에 솟는 열기를 상상하였다. 또한 그 손가락에 거부하듯이 느껴지는 탄력과, 꽃가루와 같은 향기를 생각하였다.